스포일러 경고!
이 글은 스포일러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아직 감상하지 않은 분들은 감상 후에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You only live twice:
Once when you're born,
And once when you look death in the face."
— You Only Live Twice, Chapter 11
우리는 두 번 산다:
한 번은 태어났을 때,
그리고 한 번은 죽음에 직면했을 때.
— 소설 <두번 산다>, 제11장
이번 [노 타임 투 다이]는 [스카이폴]에 이어 제목이 소설과 전혀 관련이 없는 크레이그의 두 번째 007 영화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제목과 달리 원작 소설의 코드를 드디어 제대로 복구해낸 영화이기도 하다.
이전 포스팅에선 절반만 얘기했는데, 이 영화는 [여왕폐하의 007]과 소설 <두번산다>를 모두 오마주[각주:1]하는 영화이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한 지점인데, 이로 인해 영화에서 구현하지 못했던 원작 소설의 코드를 드디어 살려냈다는 점이다.
우선 간략하게 소설에서의 설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본드가 첫사랑 베스퍼 린드를 만나지만 배신당해 완전히 털림: <카지노 로얄>
본드가 스펙터 조직을 처음으로 대면하고 일단 박살냄: <썬더볼>
스펙터를 추적해서 궤멸시키며 여기서 만난 트레이시와 결혼하나 트레이시는 피살됨: <여왕폐하의 007>
매년 베스퍼 린드의 기일엔 묘지에 간다는 얘기도 나옴
스펙터는 궤멸됐지만 살아남은 블로펠드와 맞짱을 떠서 교살: <두번산다>
하지만, 영화화는 어른의 사정으로 순서가 심하게 꼬여버렸다.
영화에서의 본드는 배신당하지도 않고 훈훈하게 결혼만 했다가 부인은 살해당하고 복수는 하다가 말게[각주:2] 된다.
이 와중에 다행히 소설 <카지노 로얄>의 영화화 판권을 획득하게 되어, 제대로 된 영화 [카지노 로얄]이 나와서 첫번째 단추가 끼워진 것이었고, 케빈 맥클로리 사망 후에 모든 권리를 인수함으로써 나머지 단추를 제대로 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소설의 코드를 살리기 위한 방향은 두 가지로 예측이 가능했다.
1. 스펙터를 추적해서 궤멸시키며 결혼하나 부인이 피살되는 <여왕폐하의 007> 오마주
2. 스펙터 궤멸 후 폭발로 인해 본인이 기억상실증에 걸리는 <여왕폐하의 007> + <두번산다> 오마주
당연히 1번일 거라는 내 예상은 틀렸고 이번 영화는 영화 [여왕폐하의 007]과 소설 두번산다를 함께 오마주했다.
[여왕폐하의 007]의 오마주는 너무 노골적이라 대체로 놓치기 어렵다.
아예 오프닝 장면에서 대사와 함께 배경음악으로 We Have All The Time In The World[각주:3]를 들려줄 정도다.
본드와 본드걸이 애스턴 마틴을 타고 있고 외부에서 헨치맨이 총을 쏘는 장면은 뭐 빼박캔트고...
오마주를 언급할 때 놓치기 쉬운 씬 중 하나인 베스퍼 린드 묘지 방문도 소설의 오마주다.
소설에선 매년 베스퍼의 기일에 그녀의 묘지를 방문한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이전의 영화에선 집어넣을 수 없었다.
소설 <두번산다>의 오마주도 의의로 노골적이다.
무엇보다 소설에서 블로펠드는 제임스 본드가 맨손으로 교살한다.
그리고, 소설에서의 주된 배경은 일본 후쿠오카[각주:4]에 있는 블로펠드의 죽음의 성(Castle of Death)이다.
여기서 블로펠드는 독초가 가득한 정원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
이 배경을 최대한 현대화해서 집어넣은 것이 일본 근처의 분쟁지역의 섬에 있는 독 정원(Poison Garden)인 것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 놈의 도게자는 이 과정에서 나온 우스꽝스러운 장면이고...
영화 [두번산다]의 장례식 장면은 애초에 페이크라서 부고가 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소설 <두번산다>의 마지막 장면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임스 본드는 폭발 속에서 죽은 것으로 인식되고, 그의 부고 기사가 실린다.
하지만, 본드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상태이고, 그를 돌보던 키시 스즈키는 본드의 아이를 임신[각주:5]한 상태.
소설에서 (아마도 M이 실은) 부고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I would rather be ashes than dust!
I would rather that my spark should burn out in a brilliant blaze than it should be stifled by dry-rot.
I would rather be a superb meteor, ever atom of me in magnificent glow, than a sleepy and permanent planet.
The proper function of man is to live, not to exist.
I shall not waste my days in trying to prolong them. I shall use my time.
먼지가 되느니 재가 되겠다!
내 불꽃이 마르고 썩어버릴 바에야 차라리 화려하게 타오르다 꺼지기를 원한다.
난 졸리고 영원한 행성이기 보다는 차라리 훌륭한 유성이 되고 싶다. 그 속에서 내 원자는 찬란하게 빛을 발할 것이다.
인간의 본연의 기능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연장하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시간을 쓸 것이다
이 중 마지막 두 줄이 영화에 등장한 그 문장들[각주:6]인 것이다.
이 영화는 전술했듯이, 오마주 장면 특히, 올드 팬들을 위한 장면들이 보인다.
다행스럽게도 그 오마주들이 절제되어 있어 [어나더데이]의 오마주인지 패러디인지 모를 장면들보다 훨씬 자연스럽다.
주제가 씬은 동그라미들이 No Time To Die로 변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이 씬 자체가 [살인번호(Dr. No)]의 오프닝이다.
게다가 사핀이 쓴 마스크는 노아(能, Noh) 마스크라 불리는 일본의 전통 마스크다.
그래서 사핀이 닥터 노(Dr. No)가 아니냐는 썰도 있었는데,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오마주의 일환.
애스턴 마틴은 오리지널 DB5에 대한 오마주와 달튼 본드의 V8 오마주가 모두 등장한다.
DB5는 무려 개틀링 건으로 업그레이드되어 화끈한 액션을 보여주기도 하고.
그런데, 더 눈이 가는 건 달튼이 탔던 것과 같은 애스턴 마틴 V8 이었다.
이건 아예 같은 번호판을 달고 나왔다[각주:7]!
원작 속 제임스 본드의 대외 신분은 해군 중령이다.
하지만, 크레이그의 영화에선 이 내용이 언급조차 된 적이 없었다.
코너리와 무어[각주:8]는 무려 해군 중령 정복도 입고 나왔었는데...
이번 영화에서 Commander(해군 중령)를 강조하는데, 이건 물론 예전의 오마주다.
본드가 스펙터의 회합에 참여하는데 회합 장소는 다름 아닌 쿠바.
이건 브로스넌 본드에 대한 오마주이다.
[골든아이]의 배경이 쿠바[각주:9]였고, [어나더데이]에서도 쿠바에서 액션을 펼친다.
실제 아레시보 천문대 붕괴 영상: 미국 NSF 제공
두 영화들 모두 실제 쿠바에선 촬영하지 못했고, 이번 영화도 마찬가지였지만, 대신 쿠바 출신의 배우가 등장한다.
바로 그 아나 드 아르마스가 쿠바 출신이다.
한편으로 아나 드 아르마스의 배역 이름이 팔로마(Paloma)인데, 이건 스페인어로 비둘기라는 뜻.
비둘기는 다름 아닌... [유어아이즈온리]의 오마주.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아니고...
팔로마와 본드는 헤어질 때 차오(Ciao)라고 이탈리아어로 인사하는데, 이것까지도 전작들에 대한 오마주다.
특히, 코너리 시절엔 참 많이 사용했던 인사였다.
오브루체프 박사를 엘리베이터로 떨어뜨릴 때 헨치맨 사이클롭스의 대사는 무려 "Keep your hair on!"이다.
이것 역시 [유어아이즈온리]의 오마주.
로건 애쉬 역을 맡은 빌리 마그누센은 꽤 배리 넬슨[각주:10]을 연상시키는 얼굴이었다.
이게 의도적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겐 일종의 오마주로 느껴졌다. 아님 말고.
이 외에도 이번 영화는 자메이카에서 발표회도 갖고, 본드가 은퇴해서 살기도 하는 등 자메이카를 상당히 많이 비춰주는데, 이건 두 말 필요 없는 이언 플레밍 본인에 대한 예의를 갖춘 오마주.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어떤 의미에선 충격적이었다.
제임스 본드가 폭격을 맞고 사망하다니!
그것도 전술함대지 유도탄[각주:11]이라니!
우리 나라도 이거 있음! 비핵무기 중에서 끝판왕 레벨 중 하나
그리고, 많은 리뷰들에서 "이 장면은 본드가 죽은 게 맞다!"고 확신들을 한다.
근데, 이건 좀 조심스럽게 볼 필요가 있다.
앞에도 썼듯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들은 소설 <두번산다>의 오마주 성격이 대단히 강하다.
본드의 아기를 누군가 가졌고, 본드는 폭발 현장에 있으며, MI6는 죽음 공식화한다.
그리고, M은 그의 죽음을 기려 "The proper function of man is to live, not to exist."라고 한다.
한편으로, 소설에서 본드가 타나카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는 아래와 같다.
"You only live twice:
Once when you're born,
And once when you look death in the face."
"우리는 두 번 산다:
한 번은 태어났을 때,
그리고 한 번은 죽음에 직면했을 때."
게다가, 당연하게도 영화의 엔드 크레딧 맨 마지막의 문구는 "JAMES BOND WILL RETURN"이다.
이걸 정말 순수하게 본드가 죽었다고 이해하는 건 좀 뭔가 이상하다.
그냥 다니엘 크레이그가 연기한 본드에게 작별을 고한다고만 받아들이는 게 더 자연스럽다.
영화 내에서 "죽을 시간이 아니군(No time to die)"이라는 대사는 나오지 않는다.
오브루체프 박사를 007이 날릴 때 "Time to die"라고는 하지만, 그건 좀 비꼬는 느낌[각주:12]일 뿐이다.
다양한 기사들에서 이 영화를 제작했을 때 프리 타이틀 씬에서 제임스 본드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었다.
만약 그렇게 됐으면 [죽느냐 사느냐]이후 프리 타이틀 씬에서 본드가 나오지 않는 첫번째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프리 타이틀 씬은 길어졌고, 본드가 나와서 애스턴 마틴까지 동원해 화려한 액션을 보여줬다.
그런데, 프리 타이틀 씬을 보면 호흡이 갑자기 바뀌는 부분이 있다.
매들린의 회상 장면과 현재의 장면은 호흡이 많이 다르다.
아마도 최초 기획은 회상 장면에서 프리 타이틀 씬이 끝나고 주제곡인 <No Time To Die>가 나오는 것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1차적으로 제목의 의미는 매들린이 죽을 시간은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2차적으로는 영화 마지막에 본드가 죽는 걸로 보이지만 사실은 안 죽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전술했듯이, 제임스 본드는 베스퍼 린드 사후 매년 그녀의 기일에 프랑스에 있는 베스퍼의 묘지에서 그녀를 추모한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 그녀의 묘지는 이탈리아에 있다.
소설 <카지노 로얄>에서 카지노 로얄은 프랑스의 가상 도시 로얄레조(Royale-Les-Eaux)에 있고, 베스퍼도 여기 묻혔다.
하지만, 영화 [카지노 로얄]에서 카지노 로얄은 몬테네그로에 있고, 베스퍼는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사망했다.
그러다보니 베스퍼의 묘지 위치를 이탈리아로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그런데, 문제는 베니스와 베스퍼의 묘지가 있는 마테라(Matera)는 비행기로 1시간 15분, 차로 8시간 정도 걸린다는 점이다.
물론, 영화 속의 가상세계에서는 이런 일은 별 일 아니긴 하지만...
참고로, 이 마테라는 1950년대에는 이탈리아의 수치라고까지 불리던 그야말로 버려진 도시였다고 한다.
지금은 다행스럽게도 영화들 덕분에 화려하게 부활했다고...
건배럴 시퀀스를 조금씩 변형하려는 시도는 60년 가까운 007 영화 역사에서 자주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최초로 피가 흐르지 않는다...
물론, 설원과의 색을 맞추기 위해서였다는 건 이해하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게다가, 건배럴 시퀀스의 음악이 MGM, Universal 로고와 함께 흐르는데, 이건 뭐 어른의 사정이겠지...
어린 매들린 스완이 보던 작품은 [월레스와 그로밋: 전자바지 소동(The Wrong Trousers)]이다.
오마주고 뭐고 아무 것도 아니고 그냥 넣었다는 게 정설.
본드가 이번에도 사력을 다해 싸우고 죽여대는데, 뜬금 없이 Q가 "럭비라도 했나요?"를 물어본다.
크레이그의 본드가 그렇게 싸우는 게 하루이틀도 아닌데, 왜 저 대사를 쳤냐면...
다니엘 크레이그가 럭비의 열혈 팬이기 때문.
영화 마지막에 M에 추모사로 얘기하는 문구는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잭 런던이 쓴 글이다.
그런데, 잭 런던은 소설가이자 언론인으로 무려 조선에도 종군기자[각주:13]로 왔었다.
그런데, 잭 런던은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고, 특히 조선에 대한 혐오가 강해서 책도 쓰고 뭐 그랬다...
뭐, 그 때야 나라가 망하기 일보직전이고[각주:14] 나라 꼴은 말이 아니었긴 했지만...
그런다고,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원주민 학살한 다음에 땅덩어리 차지한 미국놈이 할 소린 아니지...
이제 SPECTRE의 권리까지 모두 EON 프로덕션이 갖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작 SPECTRE의 원어는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첫번째 영화인 [살인번호]에서 노 박사가 얘기한 그 대사가 시리즈에서 유일무이하게 원어를 얘기한 장면이 됐다.
SPECTRE: SPecial Executive for Counter-intelligence, Terrorism, Revenge and Extorsion
예전 포스팅에서 얘기했듯이 괴작 [카지노 로얄]은 희안하게도 007 영화를 미리 패러디한(?) 경우가 꽤 된다.
이번 영화에서 보여준 "공식적으로 은퇴한 제임스 본드가 복귀한다" 역시 그 영화에서 미리 써먹었던 내용이다.
크레이그가 본드 역을 완전히 끝냄으로써 제임스 본드 역을 맡은 배우들의 출연 편수는 모두 서로 다르게 되었다.
일부러 이렇게 하려고 해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이제 다음 배우가 세 편 찍으면 퍼즐이 완성되는 건가...
션 코너리: 6편
조지 래젠비: 1편
로저 무어: 7편
티모시 달튼: 2편
피어스 브로스넌: 4편
다니엘 크레이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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