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소련 연방이 해체되면서 냉전은 끝이 나고, 냉전의 산물 제임스 본드도 임무를 끝낼 것 같았습니다. (사실, 영화에는 냉전시대 스파이 모습을 거의 안 보였지만, 원작 소설도 그렇고, 관객들이 갖고 있는 인상은 확실히 냉전의 산물입니다)
게다가 냉전 붕괴 직전에 개봉된 리얼리티 본드 영화 [살인면허]의 흥행성적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007 영화가 끝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변신한 모습으로 제임스 본드는 돌아왔습니다.
전작 [살인면허]에서 보여준 진지한 리얼리티는 물론, 코너리가 보여준 (냉전의) 긴장감 넘치는 모습, 무어가 보여준 유머러스한 노신사의 모습을 모두 버리고 가벼운 코미디로 말이죠. 그리고, 썰렁한 농담을 대충 해대는 이 가벼운 신사형 코미디는 꽤 잘 어필해서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이뤄냅니다.
1. 영화[골든아이]의 특징
a. 냉전의 승자임을 선언
냉전 기간에 소련에 대해 우호적인 모습만 보였던 모습을 버리고 러시아의 문제점을 부각시킵니다. ([골든아이]는 냉전 종식 이후 제작된 최초의 제임스 본드 영화입니다) 러시아는 부패했고 이 과정에서 장군은 변절했으며, KGB 요원은 술집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프리 타이틀 액션은 냉전 기간에서 시작하고, 주제가 화면은 소련의 붕괴를 형상화한 것이며, 범인 중 하나는 변절한 러시아의 장군입니다.
게다가, 본드는 "Governments change… the lies stay the same."이라며 비아냥거립니다.
Governments change… the lies stay the same.
하지만, 승자 영국의 요원 제임스 본드는 여전히 BMW와 같은 멋진 차를 타고서 세계 평화를 지키고 있습니다.
스팅거… 기억나? [살인면허]의 그 스팅거가 여기 있다니깐…
b. 제임스 본드는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부각
러시아의 장군은 변절해서 공격형 위성을 빼돌립니다. 공범은 영국 MI6의 요원 006입니다. 한편, CIA 요원은 해머로 때려야 시동이 걸리는 고물차를 타고 다닙니다.
CIA에서 지급한 비밀장비 슬레지 해머. 그리고, 자매품 고물 자동차
하지만, 제임스 본드는 예전 그대로입니다. 조직과 국가에 충성하고, 멋진 차를 타고 특수 무기를 사용합니다. 다소 촌스러워보여도 여전히 애스턴 마틴 DB5를 타고 다니며, 다소 촌스러워보여도 접선암호를 여전히 사용합니다. 무려 32년 전과 같이 말이죠.([위기일발]에서 접선암호를 이용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즉, [골든아이]에서는 제임스 본드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 명확히 보여줍니다.
c. 여성 등장인물의 역할 증대
[골든아이]에서는 어떠한 007영화보다 여성의 역할이 증대되었습니다. (뒤에 나온 [네버다이]의 양자경이나 [언리미티드]의 소피 마르소 등은 이것의 패러디일 뿐입니다)
M은 여자로 바뀌었고(별도로 포스팅할 예정이지만, 이건 정말 엄청난 오류입니다), 머니페니는 본드에게 까칠하게 대합니다. (악당중) 살인과 헬기 탈취는 여성이 주로 하고, 본드 옆에 있는 여성 프로그래머는 시스템을 해킹하기도 하지만, 권총도 자연스럽게 사용할 줄 압니다. 게다가, 악당이 죽이려고 하자 (아무런 남자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기지를 발휘해서 위기를 벗어납니다.
총? 그까잇꺼 뭐 대충~
2. 부각하려 노력한 흔적들
a. 냉전 붕괴 이후에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키려 함
[미션 임파서블], [롱 키스 앤 굿 나잇] 등 많은 영화들이 냉전 붕괴 이후에 존재감을 부각시키기 위해 조직이 요원을 배신한다는 줄거리의 영화를 만들어댑니다. 하지만, 일부 영화에서는 오히려 영화의 정체성이 흐트러지는 결과를 낳게됩니다.
하지만, [골든아이]는 여전히 악당은 설치고, 영국 정부와 MI6는 정의로우며 제임스 본드는 열심히 뛴다는 모습 즉, 변함 없는 그 모습 그대로로 존재감을 부각시킵니다. (이 전략은 잘 들어맞았습니다. 냉전 이후의 영화 중 정부를 위해 일하는 스파이가 주인공인 것은 거의 없습니다)
b. 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식 파괴는 먹힌다는 의지
007 영화는 전체적으로 스파이 스릴러의 모습보다는 액션 어드벤처 영화에 훨씬 가깝습니다.
즉, 몰래 티나지 않게 몇 명만 죽이는 줄거리보다는 폭탄 몇 개 설치하고 몽땅 터뜨리고 나오는 것이 주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심지어는 리얼리티를 제대로 추구했던 [살인면허]에서도 마지막 장면에선 기지 전체가 폭발하고, 유조차는 몽땅 터져나갔습니다.
그런데, 바야흐로 시대는 진정한 디지털 시대가 되었습니다. 적의 무기는 공격형 위성으로, 컴퓨터로 제어되며, 여성 프로그래머는 이 제어 컴퓨터를 해킹해서 사용불가로 만듭니다. 적의 프로그래머가 이 해킹을 풀어내자, 제임스 본드는 더 높은 수준의 해킹이 아니라… 쇠파이프 하나 끼어넣어 아날로그 구성품(구동부)을 몽땅 파괴시켜버립니다.
디지털? 컴퓨터? 위성? 구동부만 작살내면 끝이야! 문제는 아날로그야, 바보야!
즉, 아날로그식 파괴는 여전히 먹히며, 앞으로도 잘 먹힐 것이니 무대뽀로 파괴하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겠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3. 장점
a. 클리셰의 적절한 활용
[골든아이]는 이러한 전체적인 방향을 성공한 007 영화들이 보여줬던 방식으로 적절하게 보여줍니다. 즉, 본드카로 나오는 BMW Z3는 그저 소개만 하고 진면목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특수장비는 소형 폭탄 2가지와 시계, 벨트 정도로 최소화해서 장비때문에 본드가 약해보이는 모습을 방지했습니다.
비밀병기: 벨트
b. 거친 액션
007 제임스 본드와 (구 006) 알렉 트레빌리언의 싸움장면은 정말 멋집니다. 아주 스피디하게 싸우고 힘도 넘칩니다. 물론, 주먹싸움을 하기 전까지 총질하는 장면도 살벌합니다.
새로운 제임스 본드는 피지컬한 부분도 충분히 강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시켜줍니다.
006 vs 007: 확실하게 보여주는 거친 액션!
c. 현실적인 악당들
답도 없는 세계 정복을 꿈꾸는 바보들은 없습니다. 러시아의 변절자 장군과 MI6의 변절자 요원은 공격위성을 이용해서 한 나라의 정보화 시스템을 몽땅 날려버림으로써 돈도 벌고, 자신들의 기록도 없애버리는 현실적인 목표를 세웁니다. (물론, 이것이 정말로 현실적이란 뜻은 아닙니다. 007 영화치곤 적절하게 현실적이란 뜻입니다)
현실적인 악당 중 최강의 상대: 006
4. 단점
a. 전체적 구성과 배신자 구조간의 이상한 미스매치
전체적으로 프리 타이틀 - 주제가 - 본편의 구조를 보면 냉전 - 소련붕괴 - 냉전이후를 각각 담고 있습니다. 즉,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냉전이 붕괴됨에 따라 소련/러시아의 부패가 표면화되었다는 구성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소련은 붕괴됐다! 영국의 승리다!"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레닌 동상 파괴
그런데, 이상하게도 메인 악당 중 2명이 변절자인데, 한 명은 러시아의 변절자이고, 한 명은 영국(MI6)의 변절자입니다. 즉, 냉전이 붕괴되기 전부터 MI6엔 이미 변절자가 있었다는 것이 또 다른 구조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의 눈에 든 티는 봐도 내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구조를 전체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죠.
b. "인간" 제임스 본드의 내면을 보여준답시고 넣은 어줍잖은 해변 씬
006이 배신자라는 것을 알아내고 탈출에 성공한 우리의 본드… BMW 타고 잘 놀다가 갑자기 해변에서 우수에 젖은 눈길을 보내고, 나탈리아와 우스꽝스런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How can you be so cold?" "It's what keeps me alive." 이 무슨 어이 상실 장면과 대사란 말인가요? 내면을 보여준답시고 넣은 장면인데 너무 유치해서 갑자기 힘이 빠져버립니다.
웃기려면 제발 제대로 웃겨다오! 유치하게 웃기지 말고!
c. 웃기기 위한 목적 외엔 느껴지지 않는 엔딩씬
전술했듯이, 마지막 알렉과의 대결장면은 정말 멋집니다. 총싸움부터 육박전까지, 싸움의 프로라는 점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알렉을 떨어뜨리는 장면 직후부터는 갑자기 코미디로 돌변합니다.
본드가 펄쩍 뛰어 헬리콥터 다리에 매달리지를 않나, 도와주지도 않을 해병대들이 잔뜩 깔려있지를 않나… (미해병대는 놀고 먹고 할 일이 없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잠복이나 하고 있을까요?) 게다가 천하의 제임스 본드가 이런 매복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늘에 헬리콥터가 떠있다는 사실도 전혀 눈치채지 못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헬리콥터 3대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수퍼 스파이 제임스 본드"
이 장면은 사실, 썰렁한 농담으로 웃기자는 기조의 절정을 이루는 장면입니다. 액션을 실컷 보여줬으니 다음 차례는 코미디라는 것이죠. 휴~ 결국, 말쑥하게 차려입은 신사가 가벼운 코미디를 한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d. 제니아를 직접 살해한 건지 아닌지 모호하게 처리
제니아 오나토프는 강력한 킬러입니다만, 역시 여자입니다. 본드가 제니아를 살해하는 장면에서 직접 살해하는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애매한 모습을 보입니다.
본드가 제니아를 죽인 걸까요, 헬기만 부쉈는데, 별책부록으로 딸려 죽은 걸까요?
이것은 결국, 브로스넌은 전술한 코미디와 더불어 무어형 본드의 연장선일 뿐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즉, 제임스 본드는 액션 어드벤처의 주인공도 아니라 액션 어드벤처 코미디의 주인공이라는 것이죠.
5. 아쉬운 점 : 새로운 제작자들이 오버하는 계기가 됨
앞에서 다소 부정적으로 적은 면도 있지만, [골든아이]는 전체적으로는 훌륭한 007영화입니다. 액션과 코미디의 비율이 다소 불균형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닙니다. 또, 당시의 시대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어 현실감각이 떨어진다는 느낌도 그리 들지 않습니다.
게다가, 강력한 본드카가 나오지만, 활약은 하지 않고, 특수장비를 조금만 사용함으로써 액션과 특수장비 간에도적절한 균형감각을 유지합니다.
또한 여성의 지위가 강화되었다는 점도 적절히 활용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역시 EON 프로덕션의 IQ입니다. 이게 괜찮게 먹힌다는 것을 본 제작자들은 다음 작품부터는 간접광고 받은 본드카나 대충 보여주고, 여자들만 전면에 등장시키면 흥행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결국 이후의 작품들이 계속 막장으로 치닫게되는 계기가 됩니다. 게다가 다소 썰렁한 유머가 통한다는 것을 느끼면서 그저 정장 입고 코미디만 하면 007이 된다는 판단을 하게 되고, 이후 3 작품은 코미디+PPL+CG+전작들 패러디 빼면 볼 것이 없는 영화가 되어버립니다.
6.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
[살인면허](1989)의 차기작은 1991년에 나올 예정이었으나, 소유권에 관련된 법정싸움, [살인면허]의 흥행실패, 게다가 베테랑 작가 리차드 메이바움의 타계 등으로 인해 계속 연기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티모시 달튼이 하차를 선언하게됨에 따라 피어스 브로스넌이 007 역을 맡을 수 있었음
탱크가 생수 회사인 Perrier사의 트럭을 충돌하는 장면을 촬영한 후에 이 회사는 바닥에 떨어진 캔들을 부서진 캔을 포함하여 단 하나도 빠짐없이 전량 수거했음. (불법적인 판매 등을 방지하기 위함임)
진정한 PPL : 화면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Perrier 생수 간판
골든아이는 자메이카에 있는 이언 플레밍의 별장의 별칭임
"골든아이"라는 제목은 1989년 이언 플레밍의 일생을 다룬 프로의 제목 [Goldeneye]으로 처음 사용되었으며, 1995년에 개봉한 [골든아이] 외에도 1997년 게임 GoldenEye, 2004년 게임 GoldenEye: Rogue Agent의 제목으로 사용되는 등 무려 4번이나 이언 플레밍 또는 제임스 본드 관련된 내용의 제목에 사용되었음
"골든아이"라는 이름은 사실 이언 플레밍이 SIS 요원으로서 관여했던 작전의 명칭으로 이 작전은 스페인을 점령한 나찌에 대한 연합군의 작전이었음